p. 12 

클로이를 만난 것을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딱 맞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p.19 

"사람들을 꿰뚫어보는 것은 아주 쉽다. 하지만 그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엘리아스 카네티의 말이다. 타인의 흠을 찾아내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무익한지를 암시하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람을 꿰뚫어보는 일을 중단하고자 하는 순간적인 의지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 설혹 그 과정에서 눈이 약간 먼다고 하더라도? 냉소주의와 사랑이 스펙트럼의 양극단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가끔 사랑에 빠지는 것은 습관화되다시피 한 맥 빠지는 냉소주의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갑작스러운 사랑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장점을 의도적으로 과장하는 면이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 자신에게라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믿음을 가지게 된 어떤 사람에게 우리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p. 41 

물론 침묵과 서툰 태도는 욕망의 애처로운 증거로 여길 수 있다. 별로 마음이 끌리지 않는 사람은 유혹하기가 쉽기 때문에, 유혹에 서툰 사람이 오히려 진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봐줄 수도 있다. 정확한 말을 찾지 못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정확한 말을 의도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들어간 식당과 이름이 같은 『 위험한 관계(Les Liasions Dangereuses) 』 라는 책에서 드 메르퇴유 후작부인은 드 발몽 자작의 연애편지가 너무 완벽하고 논리적이기 때문에 진정한 연인의 말일 수 없다고 까탈을 부린다. 진정한 연인의 생각은 두서가 없고 말은 조리가 안 선다는 것이다. 진정한 욕망은 명료한 표현이 불가능하다. 


p.59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에 빠져 어떤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과 함께 천국에서 누리는 기쁨을 상상할 때, 우리는 한가지 중요한 위험을 잊기 쉽다. 정작 상대가 나를 사랑해줄 경우에 그 사람의 매력이 순식간에 빛이 바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타락한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이상적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서 사랑을 한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어느 날 마음을 바꾸어 나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 사람이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만하다고 인정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취향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그런 문제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내가 바라던 대로 멋진 사람일 수 있을까?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어떤 면에서 나보다 낫다고 믿어야만 한다면, 상대가 나의 사랑에 보답을 할 때 잔인한 역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묻게 된다. "그 / 그녀가 정말로 그렇게 멋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p. 63 

나는 사랑 받는 것보다 사랑하는 데에 더 무게를 두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일에 집중했던 것은 아마도 사랑을 받는 것보다는 사랑을 하는 것이 언제나 덜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며, 큐피드의 화살을 맞기보다는 쏘는 것이,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쉽기 때문일 것이다. 


  

p. 65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은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안전하게 고통스럽다. 자신 외에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초한 달콤씁쓸한하고 사적인 고통이다. 그러나 사랑이 보답을 받는 순간 상처를 '받는다'는 수동적 태도는 버려야 하며, 스스로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책임을 떠안을 각오를 해야한다. 


p.70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똑같은 요구를 공유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마음이 끌리는 상태의 핵심에 그 요구가 놓여 있다. 알베르 카뮈는 우리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 사람이 밖에서 보기에 매우 온전해보이고 - 육체적으로 온전하고 감정적으로 "통합되어" 보이고 - 주관적으로 자신을 보면 몹시 분산되어 있고 혼란스럽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만일 우리 내부에 부족한 데가 전혀 없다면 우리는 사랑을 하지 않겠지만, 상대에게서도 비슷하게 부족한 데를 발견하면 불쾌감을 느낀다. 답을 찾기를 기대했지만, 우리 자신의 문제의 복사본만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p. 78 

가장 사랑하기 쉬운 사람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p. 143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오직 인간만이 연체동물이나 지렁이와는 달리 자신을 규정하고 자의식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p.185

인간의 모든 불행은 자기 혼자 방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생긴다.


p. 201-202

우리는 한편으로는 완전한 오만으로 기울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한 겸손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내가 무엇을 했기에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겸손한 연인은 자신이 무엇을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묻는다. '내가 무엇을 했기에 사랑을 거부당하는가?' 배반당한 연인은 그렇게 묻는다. 그러면서 오만하게도 절대 자신의 몫이 아닌 선물의 소유권을 주장한다. 사랑을 베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하여 오직 한 가지 대답밖에 할 수가 없다. '네가 너이기 때문에.' 이 답을 듣게 되면 질문을 했던 사람은 자만과 우울 사이에서 위험하게, 예측할 수 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p.209

모든 삐침의 밑바닥에는 그 즉시 이야기를 했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사라질 수 있는 잘못이 놓여 있다.  


p.210

불쾌한 일이 있으면 그 즉시 화를 표현하는 것이 가장 너그러운 일이다. 그렇게 하면 상대는 죄책감을 키울 필요도 없고, 전투를 중단해달라고 삐친 사람을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p.223

이마누엘 칸트에 따르면 도덕적 행동이 비도덕적 행동과 구별되는 것은 그것이 고통이나 쾌락과는 관계없이 의무감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나의 행동에 대한 보상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의무감에만 인도되어 어떤 행동을 할 때 나는 도덕적이다. "어떤 행동이 도덕적으로 선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도덕률에 일치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행동이 도덕률을 위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기질의 결과로 이루어진 행동은 도덕적이라고 할 수 없다.

칸트 이론의 핵심은 도덕성이란 어떤 행동을 수행하는 동기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예상되는 보답에 관계없이 사랑을 할 때에만, 사랑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사랑을 줄 때에만 도덕적이다.  



20대에 이런 책을, 그것도 엄청난 배경지식을 뽐내는 것으로 가득한 책을 쓰다니, 그는 천재임이 틀림없다. 심지어 이 책이 알랭 드 보통의 첫 출판작이다.

클로이는 23살로 나온다. 그렇지만, 그녀도 굉장한 커리어 우먼임이 틀림없다. 화자는 굉장히 비뚤어진 그리고 소심한 것 같으면서도 로맨틱하고 또는 냉철하고 분석적인 사람이다.

나는 왜 이 1990년대에 쓰여진 이 책을 이제와서 읽으면서도 공감하는 걸까, 영국이 그렇게 많이 발전 했었단 말이야? 모두 전화기를 들고 다녔단 말인가? 사람이 성숙해 지기위해서는 거쳐야 할 많은 것들이 있는 것 같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소리를 너무 많이 듣고 자랐다. 사회와 합류 해야 하고 특별한 것이 꼭 좋은 것 만은 아니고 우리는 모두 비슷하게 살아갈지도 모른다. 

나는 나혼자 방에 잘 있을 수 있다. 그러니 불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잘 모르겠다. 사람을 만나는 확률, '나'가 클로이를 만날 확률은 우연이 아니라며 정해진 운명 같은거라고 생각하는 것 부터가 잘못된 것 같다. 사람은 언제나 모든 우연속에서 살아간다. 그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데서 확률을 따진다면, 그것도 우스운 일이다. 어떤 사람이 내게 꼭 들어 맞다고 생각 할 수도 있듯이, 꼭 들어맞지 않을 수도 있다. 왜 언제나 사람들은 사랑이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 처럼 구는 걸까? 지금 만나는 사람을 더이상 참을 수 없다면 그게 다른 사람을 찾으라는 신호가 아닐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변하게 만든 것은 그 순간의 자신이다. 그래놓고는 전 처럼 굴지 않는다고 변했다고 말한다. 그건 다시 원래를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갔을 뿐인데, 오늘도 엄마랑 차에서 이야기를 했다. 남을 변화시키려거든 내 마음을 먼저 바꾸고 비우는게 맞는 것 같다고, 나를 다스릴 줄 알면 천하를 다스리는 것과 같다고, 확실히 나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것 처럼 산다면, 그저 돌 같은 삶이겠지? 그 무엇에게도 열정적이지 않고 무덤덤 하다면 결코 사람스럽지 않을 것 같다. 근데 나는 아무생각하기 싫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귀찮다. 책으로 간접경험을 하는 것이 더 좋은 것 같다. 실전과 경험과 삶을 직접 내 피부로 느끼기엔 나는 나약하다. 

클로이가 했다가 실패한, 그런 아무도 없는 곳에 책들과 함께 홀로 살아보고 싶다. 너무 아무도 없다면 무서울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냥 아예 아무런 의사소통도 통하지 않는 먼~나라로 가서 나를 아는 사람들과는 모두 인연을 끊고 홀로 새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 새인생이라고 해봤자 그저 똑같은 삶이고 인간관계만을 다시 시작하는거 겠지만, 그래도 나는 적어도 3년 주기로 인간관계를 모두 정리하고 다시 시작했기에 아직도 그러고 싶다. 그냥 모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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