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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르센

2017. 2. 18. 01:39


양성애자였던 안데르센은 평생 어떤 사람과도 결혼하거나 사귀지 않고 독신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독신으로 살게 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어릴 때쓴 그의 일기에는 평생 성관계를 맺지 않겠다는 다짐이 적혀있다고 한다. 한편 젊은 시절 짝사랑 했던 리보르그 보이트(Riborg voigt)에게 차인 것이 충격이 되었기 때문에 독신으로 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외모로 놀림을 당해 자신감이 없고 소극적인 성격이었던 안데르센이 난생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상당히 긴 편지로 그 여자에게 고백을 했건만, 겨우 두 줄밖에 안 되는 답장으로 무참하게 차였다. 대신 그 여자는 그의 용기를 사서 그가 쓴 동화의 애독자가 되었다고.


하지만 독신으로 살겠다던 초년의 맹세가 아주 굳건했다고 볼 수는 없는게 그 이후에도 그는 소피 외르스테드(Sophie Ørsted), 후원자의 딸인 루이스 콜린(Louise Collin)등에 관심을 표한 바가 있다. 하지만 결국 연인관계로 발전하는 데는 실패했고, 동화 나이팅게일을 쓰는데 영감을 준 스웨덴의 오페라 가수, 제니 린드에게도 고백했으나 린드는 안데르센을 친오빠처럼 생각했기에 거절했다고 했다.


한편 유명한 동화 인어공주는 연하의 남성 에드워드 콜린(Edvard collin)과의 관계를 반영했다고 알려져 있다. 겉으로는 친구사이 였지만 내심 콜린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던 안데르센은 "여자와 같은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한다"며 절절한 편지로 고백을 감행했으나 또 거절당했다. 콜린은 이성애자였기 때문. 고백을 거절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콜린은 다른 여자와 결혼해버린다. 이 일 때문에 안데르센은 굉장히 상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안데르센이 쓴 작품이 인어공주로 그의 연구자들은 왕자가 콜린을, 안데르센이 인어공주를 상징한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그래도 콜린은 말년에 쓴 회고록에서 이 때의 일을 언급하며 자신이 안데르센의 사랑에 어떻게 반응해야할지를 잘 몰랐고 그 때문에 그가 더 많이 상처 입었던 것이라고 썼다. 못내 미안한 감정이 남아 있었던 모양.


그 외에 그가 사랑했던 남자로는 덴마크의 댄서 해럴드 샤르프(Harald Scharff),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 카를 알렉산더가 있지만 역시 사귀는 데는 실패했다. 기록에 남아있지는 않지만 종교적 신조에 반하는 일이었던 만큼 남성과 육체적 관계를 맺은 일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안데르센은 늘 짝사랑 상대에게 집착에 가까운 편지와 관심을 보여줬지만, 결국 어느 누구도 안데르센의 짝이 되어 주지는 않았다. 그가 훗날 쓴 편지에서 말하기를, 자신에게 행복은 가정의 형태로 찾아올 수도 있었지만 대신 뮤즈가 되어 찾아와 주었다고.


한스 크리스탄 안데르센의 삶은 그가 쓴 동화 중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작은 인어공주 이야기』와 꼭 닮았다. Kinsey와 그의 동료 W. B. Pomeroy는 안데르센에 관한 다양한 자료와 논문을 검토한 이후 “코펜하겐의 어느 안데르센 연구자가 소장하고 있던 미수정 원고를 통해 추정컨데 인어공주는 의심의 여지없는 동성 간 사랑이야기다”라고 주장하며 안데르센이 게이였다고 추측했다.


에드바드 콜린의 초상화


안데르센은 1835년 몰래 짝사랑하던 에드바드 콜린이 다른 여성과 약혼한다는 소식을 듣자 자신의 마음을 편지로 밝히게 된다. 그는 편지에서 “우리의 우정은 불가사의해서 그 진실을 말로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아름다운 칼라브리아의 소녀를 원하듯 당신을 갈망합니다.”라고 썼으나 콜린은 이에 질색하여 안데르센의 마음을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 무렵 안데르센이 쓴 동화가 바로 『작은 인어공주 이야기』이다. 여기서 그는 콜린을 향한 사랑에 보답 받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인간이 될 수 없는 인어로 표상했다. 안데르센은 이 동화를 1836년 콜린에게 보냈으며 이는 역사 상 쓰여진 러브레터 가운데 가장 깊 이 있는 것으로 손꼽힌다.

대부분의 학자들과 정신분석전문의들은 안데르센이 바이섹슈얼이었을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동성과 육체적인 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 (디즈니 만화와는 달리)『작은 인어공주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나는 작품이었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 작센 바이마르아이흐아이제나흐 대공에게 보내는 편지





바이마르 대공 초상화 (카를 알렉산더)


아래의 편지들은 이후 안데르센이 짝사랑 했던 또 다른 남성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 카를 알렉산더에게 보낸 것이다. 카를과 안데르센은 바이마르의 한 극장에서 처음 만난 이후 1844년 3주간 에터스부르크에서 함께 지냈다. 비록 안데르센이 유럽여행을 하는 동안 전쟁이 일어나고 서로 8년간 떨어져 지내게 되었으나 그는 대공과 함께했던 에터스부르크에서의 동화 같은 여름날을 늘 추억했다. 안데르센과 대공이 다시 만난 것은 1854년의 일이었다. 이 때부터 1857년까지 안데르센은 3년 간 매년 여름휴가마다 대공과 만났으며 안데르센이 죽기 전까지도 서로 연락하며 지냈다고 한다.



코펜하겐, 1844년 10월 26일


다정함이 묻어나는 대공의 편지를 받고 제가 얼마나 행복했을지 쉽게 짐작하셨을 겁니다. 

에터스부르크에서 우리가 헤어졌던 슬픈 순간을 다시 맞이하는 듯 한 기분이 드네요. 

당신은 제 손을 잡으며 언제나 진실한 친구로 남겠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대공께서는 저에게 보통의 인간의 마음을 아득히 뛰어넘는 시인의 영혼을 주셨습니다. 

당신의 편지는 이제 제가 가진 가장 신성한 보물 중에 하나입니다.



코펜하겐. 1847년 10월 3일


저는 저의 옛집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똑같은 사람들이 길을 걷고 똑같은 마차들이 굴러다니며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입니다. 

마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늘 다니던 곳을 다니고 극장을 방문하며 다시금 제 방에 혼자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과 머릿 속은 저 자신으로 충만합니다. 마치 장대한 무도회가 끝난 뒤에 음악의 여운이 귓가에 맴도는 것 처럼요. 저의 생각은 기세 좋은 파도와 같이 휘몰아칩니다. 저에겐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벌써 집에 온지 8일이 지났지만 그동안 전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편지조차 쓰지 않았지요. 

이것이 집에 돌아와 제가 처음으로 쓰는 편지입니다. 오늘 부로 처음 개시한 이 새 펜으로 새로이 많은 작품들을 꽃피울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네덜란드와 잉글랜드,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 보낸 지난 날들이 기쁨과 햇살로 직조한 환상처럼 제 눈앞을 스쳐지나갑니다. 

그리고 끝내는 에터스부르크에서의 아름다운 나날들을 떠올리게 되지요. 

우리의 재회와 그곳에서 우리가 보낸 나날들과 우리의 이별 그 모두를요. 

맞습니다. 저의 고귀한 친구여, 사람이란 오직 제일 좋고 고귀한 것들만을 사랑할 수 있는 법이기에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 때 당신이 저에게 보여줬던 열렬하고 애정 어린 태도가 한층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아주 사소한 것들조차 모두 제 마음 속에 남아있습니다. 

어느 선선한 저녁 당신이 저에게 외투를 벗어서 둘러주었을 때, 당신은 저의 몸만을 덥혀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덕분에 제 마음까지도 한층 강렬히 타오르게 되었으니까요.


당신의 고귀한 가족 분들은 숲이 우거진 에터스버그에 머무르고 계십니다. 당신의 누이 역시 그곳에 계시지요. 

그녀와 함께 했던 기억과 대공의 고귀한 양친 역시도 제 마음 속에 떠오릅니다. 

대공께서 제 존경어린 감사인사를 훌륭하신 여대공(대공비가 아닌 대공의 상속녀)께 전해주시길 희망합니다.

어느 날 아침 커피를 마시며 여대공과 제가 나눈 대화는 참으로 근사했었습니다. 

명랑하고 영민하신 숙녀분들께서 엮어준 화환은 타발슨(Thorwaldsen, 남성 누드작품으로 유명한 덴마크의 조각가)의 동상에 걸어두었습니다. 

아직도 잎사귀의 색이 바라지 않았고 꽃들도 기억 속 그 모습 그대로 생생합니다. 지금은 햇살이 그 화환을 비추고 있네요.

코펜하겐의 친구들은 잘 지내고 있더군요. 이제 작위를 받은 귀족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제가 사랑하는 제 친구 콜린은 언제나 그렇듯이 건강하고 활기차 보입니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테죠. 

벌써 아름다운 가을이 찾아와 제 영혼을 고양합니다. 조금 있으면 제 시작과 극작품들이 출판 될 것입니다. 

대공께서 곧 제 심장의 고동치는 맥박을 들으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쁘기가 하릴없습니다.

언제나 행복하시기를. H. C. Andersen



코펜하겐. 1848년 5월 4일


저에게 편지를 써주시다니 참으로 사려깊으시군요. 

편지를 다소 늦게 받았지만, 설령 편지를 전혀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저는 대공께서 저를 잊지 않았다는 사실을 결코 의심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나라 전체를 휩쓰는 긴장감이 제 손 끝에 느껴집니다. 제가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모국 덴마크와 독일은 지금 원한관계에 놓여있습니다. 

대공께서도 이 때문에 제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지를 짐작하실 겁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이 존엄하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습니다. 

확신컨대 만일 사람들이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게만 된다면 모든 것이 평화 속에 융성하게 될 것입니다. 

저에게 정치란 먼 하늘을 떠도는 낯선 구름과 같은 것이기에 이 편지에서까지 정치현안에 대해 말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전 유럽이 정치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에 (저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숨 쉬듯 자연스럽게 정치현안에 귀 기울일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의 고귀한 친구여, 우리가 언제쯤 다시 만나게 될 까요? 아마도 영원토록 다시 만나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면 매시간 매분 매초를 당신과 함께 했던 기억들과 우리들의 진심어린 만남이 번개처럼 스치며 제 마음은 부서져 내리고 맙니다.

당신의 고귀한 우정에 감사드립니다. 이 인사가 당신의 손에 닿을 때에 비로소 저의 고동치는 심장을 느낄 수 있기를.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돌봐주시기를.



스웨덴 트롤헤탄, 1849년 8월 18일


라플란드에 면한 극북에서 출발해 방금 여기에 도착했습니다. 

전장에 나가 봤자 쓸모없는 짐짝취급이나 당할게 뻔한 전 지난 봄 덴마크를 떠나 포성이 들리지 않는 달레카리아(현 스웨덴 달라르나)에 이르렀습니다. 

안전한 국경으로 둘러싸여 행복하고 정치적으로도 안정된 스웨덴으로 온 것입니다. 

3년 전쯤 저는 당신과 함께 스톡홀름으로 여행하기를 꿈꿨으나 이렇게 모든 것이 무산되어 버리고 혼자 여행하게 되어버렸네요. 

그러나 매일 우울하고 슬픈 가운데서도 저는 늘 당신을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마 매일 생각한다고 말해도 무방하겠죠- 오, 당신은 제가 얼마나 당신을 높이 평가하는 지, 얼마나 당신이 제 마음 속에 단단히 자리 잡았는지 꿈에도 모를 겁니다! 

지난 봄 제가 쓴 마지막 편지에 대한 답장을 이번 여름에 이르기까지 전혀 받지 못했었습니다. 

이후 전 바이마르의 분견대가 북쪽으로 진출했으며 대공께서도 전쟁에 나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 때문에 저의 슬픔은 나날이 깊어져 더 이상 아무것도 쓰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올해 비로소 종전이 선언되었기에 제 마음의 바람을 따라 이 편지를 당신께 보내게 되었습니다. 

스웨덴 북부에 머무르고 있는 터라 소식을 너무 늦게 접했기에 이제서야 기쁨의 종이 울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제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진실한, 애정어린 눈 역시 다시금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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